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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 천 탑 운주사

천상시아 2008. 6. 10. 14:56
운주사에는 다양한 불상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볼 만한 것은 와불 입니다. 운주사 계곡의 왼쪽 등성이에 있는 와불은 그 크기만 해도 어마어마합니다. 와불은 ‘누워 있는 부처님’을 뜻하는데, 부처님이 열반(불교에서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영원한 진리를 깨달은 경지)에 드셨을 때의 자세를 가리킨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은 실제로 와불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옆으로 누운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운주사 와불은 불상을 바위에 새긴 뒤, 그것을 뗀 다음 세우려다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길이만 12m 정도 되니 못 떼어 낼 만하죠. 떼어 내려고 했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흔히 이 불상이 일어서는 날 세상의 근심과 불행이 없어지고 이상적인 나라가 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천불 천 탑의 사연이 있는 곳 - 운주사


현장 마당 / 역사 흔적 바로 보기


◎ 운주사의 다양한 창건 설화에 대해 알아보자.

◎ 운주사에는 어떤 모양의 탑과 불상이 있는지 알아보자.

 

들어가면서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에 있는 운주사는 ‘배를 운전한다.’는 의미의 운주(運舟)와 ‘구름이 머문다.’는 뜻의 운주(雲住), 이렇게 두 개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광주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운주사는 옛날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탑이 계곡 안에 가득했다고 하여 ‘천불 천 탑동(千佛千塔洞)‘이라고도 불렸죠. 이처럼 많은 불상과 탑이 한곳에서 발견된 예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운주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탄성을 자아냅니다. 탑들이 산등성이와 골짜기 여기저기에 우뚝 솟아 있고, 바위 아래에는 크고 작은 불상들이 마치 가족처럼 늘어서 있어, 여느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지요.

 


〈답사 전에 잠깐!〉

도선 국사와 관련된 운주사의 창건 설화


오늘날 운주사에는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탑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수의 불상과 탑이 남아 있습니다. 운주사에 오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불상과 탑을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어느 절이든 그 절을 세우게 된 내력이 담긴 창건 설화가 있지요. 그런데 운주사는 창건 설화가 꽤 여러 가지 있습니다. 천불 천 탑을 살펴보기 전에 운주사 창건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부터 알아볼까 합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우리나라 풍수지리(인생에서 생기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땅의 모양이나 위치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의 선구자(어떤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이나 사상에 있어 남보다 앞서 나가는 사람)였던 도선 국사와 관련된 것입니다. 도선 국사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활약한 사람으로, 고려의 건국을 예언했습니다. 그는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왕실의 후손들에게 내린 10가지 충고)에 등장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도선 국사는 도암면 용강리 일대 지형을 살피다가, 용강리 일대 지형이 미래에 임금이 태어날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임금이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술을 부려 하룻밤 사이에 천 개의 탑과 불상을 세웠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많이 알려진 설화는 도선 국사가 우리나라 지형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운주사를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봤을 때,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태백 산맥이 있는데, 서쪽에는 큰 산이 없어 균형이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선 국사는 전라남도에 천불 천 탑을 만들어 그 균형을 맞추었다고 해요.


오늘날 운주사에서 발견된 탑이나 불상의 양식 등을 보면, 이 절이 10세기 후반에 지어져 12세기에 절정을 이뤘던 것으로 집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선 국사는 9세기 사람이니, 10세기 후반에 창건된 운주사와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도선 국사를 운주사 창건 설화에 출연시킨 것은 풍수지리의 선구자였던 그를 이용해 운주사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 지어진 많은 절의 창건 설화에서 도선 국사가 절을 세웠다거나 절에서 수행을 했다는 이야기를 흔히 볼 수 있으니까요.

 


지방 호족 세력의 큰 영향력


운주사 창건 설화는 도선 국사 이야기 말고도 최씨 무인 정권(고려 시대 1170년에서 1270년까지 무인들이 나라를 지배한 시기)이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노비들이 세운 이상향의 세계, 즉 미륵 신앙과 관련되었다는 창건 설화도 있죠.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운주사 근처에 살던 일부 백성과 노비들만으로는 이런 천불 천 탑의 절을 짓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만한 공사를 하려면 큰돈과 많은 사람이 필요했을 텐데, 이것을 일부 백성과 노비들의 힘만으로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겠지요.


사실 고려 시대는 지방 호족(옛날에 어떤 지방에서 재산이 많고 세력이 강한 집안) 세력이 번창했던 시기로, 특히 운주사가 있는 전라남도 화순은 나주평야와 함께 호족 세력의 근거지였습니다. 그러니 운주사에 세워진 많은 탑과 불상들은 지방 호족 세력의 돈으로 세워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불 천 탑은 통일 신라 시대의 귀족적인 불상과 탑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투박하고 거친 모양으로, 마을 어디에서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의 불상과 탑입니다. 통일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의 불상이나 탑을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비례가 얼마나 잘 이루어졌고, 조형미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입니다. 통일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불상인 석굴암 본존 불상은 완벽한 비례와 엄숙함까지 느껴지는 조형미가 있지만, 고려 시대 대부분의 불상은 마치 씨름꾼과 같이 떡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입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례와 조형미와는 거리가 먼, 일반 백성들의 순수함이 묻어 있는 불상들이 대부분입니다.

 

<차근차근! 문화유산 살피기〉

다양한 석탑들


운주사에 들어서면 먼저 탑들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뜨입니다. 탑의 층수는 3층, 5층, 7층, 9층 등이고, 탑에는 × , ◇ , ∨의 기하학적인 무늬도 새겨져 있습니다. 또 호떡 모양으로 생긴 탑이 있는가 하면, 항아리 모양의 돌을 얹어 놓은 것 등 다양한 모양의 탑들이 계곡에 가득합니다.

 


운주사에서 대표적인 석탑 몇 개를 살펴보면, 먼저 운주사를 들어서자마자 입구에 당당히 서 있는 높다란 9층 석탑이 있습니다. 큰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 탑의 몸 돌(탑의 몸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탑신’이라고도 함)에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가득한데, 아직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9층 석탑을 지나 운주사 중간 지점에 오면 탑과 불상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나옵니다. 그중 호떡 모양으로 둥근 원판을 쌓아 놓은 원형 다층 석탑이 있는데, 기단(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바닥이 되는 단)의 돌은 10각으로 원형에 가깝고, 그 위의 갑석(돌 위에 뚜껑처럼 포개어 얹어 놓은 납작한 돌)에는 활짝 피어 있는 연꽃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날은 그 위로 호떡 모양의 지붕 돌(탑의 층수를 결정하는 돌)이 6개 남아 있지만, 몇 층까지 더 있었는지 알지 못해 그냥 ‘다층 석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산 위로 오르면 원구형 다층 석탑(圓球形多層石塔)이 있습니다. 항아리처럼 생겨 ‘항아리 탑’ 또는 스님들의 식사 도구처럼 생겨 ‘발우 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생김새를 보면 긴 사각형의 기단 위에 팔각형 모양의 갑석을 놓고, 그 위에 항아리 형태의 돌을 얹어 놓은 탑입니다. 예전에는 7개의 항아리 모양의 돌이 얹혀 있었지만 지금은 4개만이 남아 있지요.

 


세련되지 못한 투박한 불상


운주사에 있는 불상들은 벌어진 어깨, 평편하면서 투박하게 생긴 얼굴, 어색한 옷 주름, 세련되지 못한 조각 기법 등이 특징입니다.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대중적이 되면서 부처님의 모습을 접근하기 어려운 신적인 존재로 표현하기보다는, 마을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부담 없는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또 운주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친근한 석불들은 바위를 등지고 일렬로 앉아 마치 가족회의라도 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도선 국사가 앉아서 공사를 관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공사 바위 아래에는 마애여래 좌상이라는, 바위에 직접 새겨 넣은 불상도 있습니다.

 


칠성 바위 이야기


와불에서 운주사 입구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산 중턱에 칠성 바위가 있습니다. 소나무 사이로 일곱 개의 바위가 규칙적으로 놓여 있죠. 칠성 바위에서 칠성*이란 북극성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하루에 한 번씩 도는 북두칠성을 말합니다. 우리 조상은 별자리 가운데서도 가장 밝게 빛나는 북극성과 그것을 중심으로 도는 북두칠성을 숭배(높이 우러러 공경하고 받드는 것)하였습니다. 이 별자리가 사람의 운명과 행복을 좌우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옛날 우리 할머니들은 집안이 잘되고 식구들이 건강하게 해 달라고,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고 칠성에 빌곤 했지요. 우리나라 불교에도 이런 민간 신앙이 스며들어, 많은 절에서 칠성각을 볼 수 있답니다.



tip 칠성을 숭배한 이유?

칠성은 북두칠성의 탐랑·거문·녹존·문곡·염정·무곡·파군의 일곱 성군, 즉 칠원성군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칠성을 숭배하는 것은 별이 좋은 일과 나쁜 일뿐만 아니라 인간의 수명을 지배한다는 도교의 믿음에서 나왔답니다. 칠성은 맡은 임무가 약간씩 다릅니다. 탐랑은 자손들에게 복을 주고, 거문은 장애와 재난을 없애죠. 녹존은 사람들이 지은 죄를 없애 주고, 문곡은 구하는 것을 얻게 해 줍니다. 염정은 백 가지 장애를 없애고, 무곡은 복과 덕을 두루 갖추게 하며, 파군은 수명을 늘려 준답니다.


 

〈답사 갈무리!〉

운주사에는 이처럼 창건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더불어, 천불 천 탑이라고 부를 만큼 많은 석탑과 석불이 있습니다. 그런데 운주사는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만들었는지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천불 천 탑에는 그 다양한 모습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묻혀 있는지 모릅니다. 신비로운 운주사의 천불 천 탑을 보면, 그 당시 순수한 믿음을 지녔던 우리 조상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운주사에 서면 돌을 쪼던 정 소리, 저 위 공사 바위에서 공사를 지휘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려오는 듯합니다. 꽃샘추위로 아직 차가운 바람이 부는 운주사 계곡에는 탑과 불상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앞으로도 묵묵히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겠지요.

 

◇ 추천 답사 코스

운주사를 돌아보면서 주변에 있는 유적지도 함께 둘러보면 더욱 좋습니다.


알찬 하루코스 : 운주사 → 불회사


1박 2일 코스

운주사 → 불회사 → 도곡 온천 숙박 → 쌍봉사 → 조광조 유허지 → 벽나리 민불


 

2007 중학 독서평설 3월호

 

 

글/사진 우일신 정표채(다음 나의문화유산답사 대표)

본 내용은 지학사 중학 독서 평설 3월호 기고 내용입니다.(판권은 본인 및 나문답에 있습니다)  .  http://cafe.daum.net/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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